해방이후 수자원 개발정책의 토대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과 함께 동년, 11월 4일 대한민국 내무부 토목국 이수과를 시작으로 1961년 10월 2일 경제기획원 소속의 국토관리청 수자원국으로 거듭나 같은 해, 12월 18일 공유수면매립법과 12월 30일 하천법을 제정하는 등 수자원관리체계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정부는 우리 국민의 눈물과 땀으로 얼룩지고 피와 바꾼 달러를 종자돈으로 경제, 경제개발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 중공업 중심으로 국가정책을 전환하고 수송능력을 갖추기 위해서 국가대동맥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 계획을 세우고 제철소 건설과 전자 및 화학 공업단지 건설 등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을 추진하였다.
이에 발맞추어 건설부 수자원국에서도 생활 및 공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하여 1966년부터 1971년까지 “미국 국무성 개척국”, “일본 국제 협력처(JICA)” 등과 한강, 낙동강 등 수자원 조사를 실시하고 “4대강유역 종합개발계획”을 수립한 후 한강에 소양강댐(1967년~1973년 준공), 낙동강에 안동댐(1971~1975), 금강에 대청댐(1975~1980)과 같은 특정다목적댐을 건설하였다.
포항제철소가 1968년 4월 1일 착공을 하고 1973년 6월 9일 조강생산에 들어가자 우리 건설부에서도 1974년 영천댐 건설과 영천댐~포항간 총 40km의 송수시설공사를 하는 ‘영천제 계통 포항 공업용수도’ 공사가 착공되었다. 1979년까지 포항제철에 1일 22만톤의 공업용수를 공급할 목적에서였다.
필자가 이 사업의 총감독관으로 있을 때 댐 공사 현장은 본부의 설계변경과 대한전척 등 3개사의 도산과 부도로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가 없었다. 그런 가운데, 송수관로 40km 중 장대터널 6777m 건설은 총발파암, 12만㎡를 파내기 위해서 8개 굴착장에 1일 100~150명이 투입되어 돌관 작업을 하였으나, 진척이 없고 기성금이 지불된 구간도 완성단면이 아니었다.
와중에 시멘트 파동으로 116만대의 시멘트가 반입되지 않아 굴착이 완료된 구간도 콘크리트 작업을 할 수가 없었다. 용수공급 시기에 맞추기 위해서는 우선 굴착 공정이라도 만회해야 하는 상황에서 땅굴 파는 두더지들의 애환을 들어보기로 한다.
땅굴 속의 풍경
깊이 273m의 경사진 사갱을 조심조심 내려가 본 터널에 도달하면 좌·우로 어두운 굴이 을씨년스럽게 뚫려있고 퀴퀴한 나무곰팡이 냄새와 저 멀리 희미한 전등불이 안개에 젖은 듯 가물거리는데 땅굴 천정에서는 물 떨어지는 낙수소리가 뚬벅, 뚝, 뚬벅하고 적막을 깬다.
방금 천정에서 흙더미가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어두운 굴속을 철벅, 철벅 걸어가며 손전등을 비추어 발파상태를 파악하고 채 뚫어지지 않은 흙무더기 사이 개구멍을 기어서 다음 작업장으로 넘어가다 보면 행여 천정이 무너져 바위 덩어리가 쏟아지지나 않을까 두려운 마음에 목적이 울꺽하며 고인 침을 삼킨다.
얼마를 전진했을까 천정에 전등이 희미한 불빛을 비추고 두런두런 사람소리가 난다. 가까이 가니 석탄채굴장의 광부같은 인부 10여명이 중참을 먹는 중이다. 우리 일행은 “수고하십니다.”하고 지나간다. 그 순간 그중의 어느 누구인가 국수국물이 남아 있는 듯한 양제기 그릇을 획 집어 던진다. 아무도 말이 없다. 적막 속에 양제기가 암반에 부딪치는 소리가 쨍강한다. 적막이 흐른다. 무엇인가 불만의 표출이다. 어둠속 그들은 우리가 누구인지 모른다. 그저 귀찮은 사람쯤으로 알거다.
필자는 기분이 나쁘다. 순간 걸음을 멈추고 섰다. “소장, 예 감독들에게 긴 칼을 허리에 차고 다니게 해 주시오.” 어찌하랴 그들은 위험이 상존하는 어우둔 굴속, 열악한 환경에서 밤인지 낮인지도, 해가 뜨는지 달이 뜨는지도 모른 채 고된 일을 하고 보수는 얼마되지 않는다. 불쌍한 사람들이다.
땅굴 밖의 풍경
장대터널 6777m에는 입·출구와 4개의 사갱과 4개소의 막장이 존재하고 이 막장을 향해서 8개 작업팀이 마주 향해 굴착 작업을 진행하는데, 중심선 측량이 잘못되면, 터널 상·하, 좌·우 서로 다른 방향으로 전진하게 되어 막장에서 만나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도급자의 금전적 손해도 크지만 재시공에 의한 시간적 손실로 용수공급에 차질이 발생하게 되므로, 각 공구 막장에 가까워지면 모두가 긴장한다. 다행히 3개 막장은 오차 없이 관통되었기에 가장 긴 마지막 막장에서 만나는 날은 돼지머리 ‘제상’을 차려 놓고 ‘측량에 오차 없이 막장에서 만나게 하소서,’ 하고 대구청장을 모시고 제를 올리기도 하였다.
필자가 술잔을 올리고 두 번 절하고 일어서니 옆에 두 손 모으고 서 있던 인부 중 한 사람이 제상의 술잔을 들어 쭉 마셔버린다. 순간적이었다.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필자는 “그래, 잘했다. 굴속에서 밤낮으로 고생한 당신이 먼저다.” 말이 끝나는 순간 쿵·쾅 발파소리가 요란하다. 모두가 긴장한 가운데 무전이 왔다. “관통이다!”는 무선전화에 우리 모두 만세를 불렀다.
시멘트 독(毒)과의 전쟁
영천제 계통 포항공업용수도 공사에 사용될 시멘트 총량은 131만 2468포대다. 시멘트 파동으로 인하여 반입이 중단되었던 116만 4251포대의 수입산 시멘트가 일시에 현장에 반입되기 시작하여 영천댐에서부터 터널공사장, 안계댐 형산강까지 군데군데 산처럼 쌓이게 되었다.
시멘트는 관급자재다. 무단유출을 방지해야 하고 국가물건을 도둑맞아서도 안 된다. 수급자가 인수 관리하기로 되어 있지만 믿을 수가 없었다. 필자는 감독 체제비로 시멘트 지킴이를 고용하고 차량은 회사에서 한 대 지원받기로 하는 등의 방법으로 영천댐을 비롯하여 터널 사갱 5개소, 안계댐 등의 적치장에 쌓여있는 시멘트를 지켜야 했다.
이 시멘트를 소모할 방법은 터널복공을 빨리 추진하는 수 밖에 없었다. 라이닝 콘크리트 돌관 작업이 시작되면서 경사 1:300으로 자연 유하되는 터널바닥은 군데군데 물 흐름을 막고 있는 흙더미 때문에 걸쭉한 시멘트물이 항상 고여 있다. 필자는 수시로 허벅지까지 오는 긴 고무장화를 신고 철벅철벅 시멘트 물을 튀기며 이곳저곳 손전등을 비추어 살피면서 몇 시간이고 걷는다. 장화 속에는 모래 섞인 시멘트 물이 절벅거린다.
굴속 현장 확인이 끝나고 200여m의 경사진 사갱을 기어오른다. 땀에 젖은 얼굴은 창백하고 하늘은 노랗게 물들어 있다. 장화를 벗고, 화닥거리는 발을 씻노라면 발바닥이며 발가락이 모두 시멘트 물에 스쳐 군데군데 파여 있다. 몹시 아팠다. 이 날은 너무 많은 거리를 걸었나 보다.
상태가 좋지 않아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왜 이렇게 되었느냐고 묻는다. 시멘트 물에 스쳐서 파였노라고 했더니 “노동일을 하더라도 시멘트와 관계없는 일을 하라.”고 하며 위로한다. 필자가 막노동자인 줄 알았나 보다. 의사선생님 옆에 초등학생 아들과 서 있던 한 아주머니가 “봐라, 너도 공부 안하면 커서 저 아저씨처럼 된다.”고 계도를 한다. 걸을 수가 없어 입원을 했다.
이렇게 하여 6777m 수로터널의 라이닝 콘크리트공사가 완성된 후 감사원 감사가 시작되었다. 원래 어려운 현장일수록 감사는 심하게 받는다. 완성 단면을 확인하기 위하여 26개소에 달하는 라이닝 콘크리트 두께의 보링검사가 실시되었고, 그 결과는 모두 합격이었다. 시멘트 독으로 고생은 했지만 애써 감독한 보람이 있었다.
그러나 라이닝용 철재 거푸집 철판두께가 2~3㎜ 부족하다는 감사관의 지적이 있고 필자가 확인서 서명을 거부하는 바람에 문제가 생겼다. 서울행 기차표를 연기하라는 지시가 떨어지고 재검사 시작되었다. 살이 떨어져 나가는 고통을 겪으면서 그야말로 철판이 닳도록 감독을 했는데 거푸집 두께가 문제인가, 필자는 잘못했다는 확인서를 써 줄 수가 없었다. 결코….감사는 언제나 그랬다. 선배·동료기술자들 모두가 이렇게 살아왔다.
<대한건설진흥회 발간 ‘국토교통인의 향기’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