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 성전 건설 당시... 이슬람 종교적 문제로 몸고생 마음고생 심하게 해
모스크 성전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내외부, 바닥 심지어 화장실까지 모두 화강석을 사용해야 했다. 게다가 외부 화강석에는 아랍어로 코란을 음각해야 했다. 문제는 현지 화강석이 국산에 비해 3배 가까이 비쌌다는 점이다. 관건은 이슬람 사제단을 어떻게 설득해 국산 화강석을 승인받아 수입하여 설치하는가에 달려 있었다.
이슬람 사제단 측은 신성한 성전이므로 자국산을 고집했고 우리 측도 예산문제 때문에 반드시 국산을 사용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 서울 한남동의 이슬람 사제단의 추천서와 국산 화강석 샘플을 제시하며 설득을 시작했다. 코란을 음각해야 하는 문제는 해외기술실의 윤병양 사장과 김정훈 이사가 당시 한국외대에 근무했던 아랍인 교수에게 부탁해 코란문구를 조각하여 보내게 했다.
사우디아라비아 현지회사는 한국의 화강석이 품질은 좋을 수 있어도 코란을 음각할 수는 없을 거라며 자신만만해 했는데 그 자리에서 코가 납작해졌다. 각고의 노력 끝에 현지 사제단의 승인을 받아 국산 화강석을 사용할 수 있게 됐다.성전 건축의 두 번째 문제는 바닥에 설치할 카페트였다. 예배 시 무릎을 꿇을 수 있도록 재작해야 했기 때문에 별도의 규격기준이 있었고 문양 역시 독특했다. 이 역시도 현지회사의 가격이 국내산에 비해 3배 넘게 비쌌다. 하지만 이번에는 훨씬 쉬웠다.
'100% 울 소재에 핸드메이드' 조건이면 한국산이라도 반대하지 않겠다고 사제단 측에서 먼저 알려왔기 때문이다. 담망항에 입항해 모스크 현장까지 공수해 온 국산 카페트를 70여명이 등짐을 지고 나르는 모습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신기한 구경거리가 됐다. 마치 상여를 메고 장지를 향하는 상여꾼의 모습처럼 장관이었다.
세번째 문제는 티크목재가공품(Decorative Teak wood-work)였다. 모스크 내부의 실내장식, 강단, 의자, 창문틀 등의 대부분이 티크목재로 설계돼 있었다. 자재를 제공하기로 되어있던 회사는 미국계 회사였다. 김대표 본인도 당시 한국에서 티크 목재를 수입, 가공하는지 알지 못했다고 한다. 미국감독관들도 가난한 한국은 가공기술이 낙후되어 있으므로 반입이 어려울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한 가닥 희망을 품고 한국에서 목재샘플을 들여왔다.
목재에 관한 승인은 아람코 총괄디자인실에서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술관들을 대동하고 온 현지담당관은 손으로 샘플을 만지작거리더니 의외의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몇 년 전에 한국여행을 다녀왔다. 경복궁 근정전을 보고 목조건축물로서는 세계에서 둘도 없는 훌륭한 걸작품이라 생각했다. 한국제품이라면 환영한다. 승인한다." 뛸 듯이 기뻤다.
예산적자는 그 때 까지만 해도 기정사실화 되어 있었다. 조국의 소중한 건축문화유산 덕에 적자도 면하고 회사에서 인정도 받을 수 있었다. 뜨거운 눈물이 솟구쳐 나올 뻔 했다며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타국의 공사현장에서 가족을 그리워 하며 수년을 보냈다. 그간의 쌓인 피로가 말끔히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운칠기삼 또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이 있다. 결국 수없이 노력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별한 행운 덕에 정해진 예산의 99%에 아람코 대 모스크공사를 무사히 끝낼 수 있었다.